2007년 06월 05일
치한범과 텔레비젼
물론 이전 포스팅에서 엄청난 무게를 잡고 오버를 했지만 사실 처음 "새 글 쓰기"를 눌러서 오랜만에 무슨 포스팅을 할까- 라고 생각했던 3일 전쯤의 시점에서는 두 개의 거물급 소재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학생활과 주인장」시리즈 (아직 1회밖에 없지만 시리즈물이 될 가능성이 1할 정도 있으니 넘어갑시다)는 사실 주인장이 느낀 것을 써 내려간 형태이니, 주로 이 블로그에서 다루고 있는 (안습/개그)에피소드 중심의 포스팅들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지요. 여하튼 그 경합에서 「유학생활과 주인장」시리즈가 승리하여 결국 어제의 뉴 포스트 자리를 얻은 것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평소의 이 블로그의 기본방침(물론 제가 스스로 정한거 아닙니다만, 인정은 합니다)인 가벼운 개그안습블로그에 뜬금없이 유학생활에 대해 고찰(!)하고 진지하게(!)이야기를 하다니. 드디어 주인장이 신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느냐 하면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고로 아까 시리즈물이 될 가능성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사회적 체면과 위신(...)이라는걸 참치캔에 들어있는 DHA의 분량 정도는 인식하고 있으니, 나름 놀림감 25년짜리 화제나 나중에 죽어서 묘비에 새겨질만한 사건의 경우는 포스팅을 하지 않는 편이지요.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나의 주변에서 놀림감 25년짜리 일이 밥먹듯이 자주 일어나는데 내가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고로 위에서 말한 경합중인 포스팅 중 하나는 나의 굴욕레벨이 개그로 전환해서 포스팅의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약 1주일 전이 됩니다.
주인장은 작년 9월에 이 곳에 왔는데다가, 교환학생은 학기단위로 파견되므로 올해 봄학기에도 한국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에 오기로 되어 있지요. 보통 교환학생은 여학생 쪽이 많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예상적중이어서 2명 모두 여학우가 되겠습니다. 애국심이라던가 애교심을 기반으로 친한척 500% 파티플(...)을 할려고 달려드는 건 캐주접이고, 고작 6개월 더 있었다고 경험자인 척 하면서 잘 모르는 그녀들에게 찾아가서 일본생활 및 일본어의 마스터인 양 순회공연을 할 이유도 능력도 없으니, 요는 "나랑 별로 관계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간단한 통성명 정도에 그치는 관계였습니다요. 그 이후로 한번도 본 적이 없구요.
참 정나미없는 말이긴 한데, 청하지도 않은 도움을 자진해서 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좋은 경험을 할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되므로 그냥 내버려 두는게 좋을거라고 봐요.
그런데 살살 날이 더워지려고 하는 5월의 어느 날 뜬금없이 핸드폰으로 한국어 전화가 걸려온 것입니다. 사실 이름이랑 소속학부마저 까먹어 버린 그 이번 학기 교환학생 2명 중 한명이지요.
사정을 들어 보니, 둘 다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교환유학을 온 것으로, 일상적인 회화에는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전문적인 대학의 강의나 전공서적 등을 읽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혼자 나머지 3명과 다른 캠퍼스에
배속되었는데, 일본어가 능숙하지 못하니 처음에는 외국인이라서 다소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의사소통이 버벅대니까) 곧 떨어져 나가서 일본어 학습에 매우 난항을 겪고 있다... 라는 내용이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있는데, 중간에 "텔레비션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당시 시점에서 저는 저보다 반 년 먼저 교환유학을 왔다가 지금은 한국에 돌아간 선배 교환학생이 쓰던 텔레비젼을 "후배에게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맡아 놓고 있었는데, 이걸 텔레비젼을 후배에게 전해주는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생각해서 "나중에 텔레비젼을 주겠다"라고 약속을 해 버리고 맙니다. 저도 처음 왔을때 텔레비젼을 물려받았으니 당연한 이야기지요. 뭐, 언어를 배우는게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가 그 나라 방송을 보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텔레비젼이라고 해서 요즘 선전하는 종이짝같은게 아니라 그야말로 시대의 유물이라는 느낌의 텔레비젼이라 (98년 생산) 생각보다 부피도 무게도 굉장한 편인데, 이걸 여성분에게 들려 보내기에는 조금 뒷맛이 꺼림칙하죠. 그래서 나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선행을 베푼답시고, 이 텔레비젼을 그녀의 집에 전달해 주겠다는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사람 놀이를 하게 됩니다.
히가시후츄(東府中)까지 그 텔레비젼을 들고 집앞까지 갔다준 김에, 설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대충 3층 정도였던 거 같은데, 대체 콘센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참 이리저리를 뒤엎고 있는데, 문득 관내 방송으로 들려오는 소리.
"아――― 현관에 놓인 검은 구두는 누구의 것입니까?"
아니 현관에 신발 좀 있으면 안되나. 나중에 해명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해고 대충 넘어간 게 나의 패인이었습니다.
제 발 크기가 280cm전후인데다가 구두도 시커먼 것이니 누가 봐도 남성용 신발임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발 하나 가지고 관내 방송을 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요. 현관에 신발을 방치한 것 가지고 건물 전체에 방송을 한다는건, 이 건물 안에 저런 일이 참 드물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김전일 급의 추리력으로 가능한 시츄에이션은...
① 이 건물의 입주자들은 너무 깔끔해서, 반드시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다.
→ 물론 가능한 이야기이긴 한데, 그걸 가지고 방송을 날리는건 조금 오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② 신발 크기가 커서 슈렉이나 기타 인간이 아닌 것이 관내에 들어왔음으로 주의를 요한다.
→ 어디의 초등학교 저학년용 괴기학습추리공상과학만화 같군요. 집어치웁시다.
③이 건물 안에 남성용 신발이 있는 것이 드문 일이다.
→ ...잠깐. 좀 기다려.
가장 유력해보이는건 ③의 가설인데 이건 곧 다른말로 하면, 이 건물은.
주인장「저기,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요」
여학우「네?」(콘센트를 찾고 있다)
주인장「혹시 여기 여자 기숙사인가요?」
여학우 (벽 사이에 머리를 들이민 채로) 「네. 그런데요?」
여학우「네?」(콘센트를 찾고 있다)
주인장「혹시 여기 여자 기숙사인가요?」
여학우 (벽 사이에 머리를 들이민 채로) 「네. 그런데요?」

「그런데요」라니, 지금 이거 엄청난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 아니...
뭔가 내려가서 해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여학우에게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열려 있는 방문 쪽을 보니,
...경찰이 와 있었습니다.

격렬히 위험합니다. 상황으로 보건대 틀림없이 이 여자 기숙사의 관리인은, 나의 그 괴물같은 크기(...)의 신발을 보고, 어딘가 근처의 연쇄치한혐의용의자가 가련한(...) 아가씨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침입한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문 밖에서 경찰 1인 및 관리인 부부와 제 시선이 맞은 지 한 3초 정도 지난거 같은데, 서로 이 죽을만큼 공포스러운 침묵. 빈집털이를 하다가 주인이 갑자기 들어와 눈이 마주치면 대충 이런 기분일거 같습니다. 3초간 뇌가 수능시험장의 3배 정도의 성능으로 돌아가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론은.

별거 있나. 사실 이 상황은 다소의 오해일 뿐이지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소 해프닝스럽게 상황이 전개되고는 있지만 사실 내가 죄진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요. 나는 마음을 진정하고, 니놈은 뭐하는 놈이냐는 시선에 대해 당연하게 현재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당연히 옆에서 변론을 해 줘야 할 이 여학우가, 너무 당혹스러운 이 시츄에이션에 대해, 그렇지 않아도 잘 못하던 일본어가 아예 굳어서 완전 침묵상태에 빠진 겁니다. 오 지쟛스. 뭔가 말을 해줘. 부탁이야.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워서 뇌와 언어신경이 굳는건 알겠는데, 잘못하면 난 유학생활 전체가 굳어버릴수도 있단 말야.
자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침착하죠 침착. 경찰 및 관리인 쪽의 상황 인식에 대해 번호를 매겨 정리해 봅시다.
①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이 자신은 결백하다고 나름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고 있다.
②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표정이 굳어 있다.
물론 여기서 내가 여학우에게 한국어를 이용해 "뭔가 변론을 해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 경우 상황 인식은
①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이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한국어)로 이야기를 했다
②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은 표정이 굳어 있다.
...당연히 의심이 증폭되므로 한국어를 말해서는 안되는 상황입니다.

점차 뒤에 구경꾼이 늘어나고, 「なに?ヘンタイ?」(뭐야, 변태야?) 「サイテー」(쓰레기같아-) 같은 구경꾼의 대사가 얼핏얼핏 들려오는 가운데. 나의 저항은 무의미하게 끝나고...

P.S.
이후에 여학우가 정신을 차려, 상황에 대해 해명을 해 주는 것으로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줄 같은거 안 그어졌슈.
# by | 2007/06/05 15:35 | SA-Tokyo | 트랙백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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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그 아가씨도 참...
기숙사에 외부인 데리고 들어가려면 방문기록 남기게 하는 것 정도는 센스 아닌가..--;
처음부터 여자기숙사란 말을 안해주면 우짜란 말..(...)
발이 280cm 라니 캐사기군 (할짓없이 졸래 태클)
그나마 그 여학생이 조금이라도 일본어를 하니 다행... 생각보다 일본생활은 힘든건가..
군대생활도 그렇게 나쁜곳은 아니라서 나름대로 잘 살고있지.
다음달이면 곧 병장이지요.
나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분명 내가 정체되어있었다는게 정답이겠지.음음.)
이런 기분도 뭐 나쁘지 않아. 아무튼 자주 들릴게~~
ps. 그나저나 치한같으니(....). 마음씨를 좀더 곱게 먹고 살렴(풉)
아, 저는 에밀 크로니클 온라인 '클라니스'입니다.